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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 00:46

 

 

 

 

 약속 없는 주말이면 으레 동네 서점에 가서 몇시간이고 죽치며 책을 읽고는 하는데, 지난 토요일에는 갑자기 김애란의 소설이 날 봐! 날 집어!! 하며 유혹해왔다. 신간 코너에 놓여있는 '비행운'이라는 단편집. 나는 보통 호흡이 긴 장편 소설을 좋아하는 편임에도 어쩐지 이 제목은 끌리는 맛이 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거진 3분의 2 가량을 읽은 것 같다. 개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첫번째 단편과 중간즈음의 '하루의 축'이라는 단편.

 

 첫번째 단편은 대학 시절 좋아했던 남자 선배를 후일 사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상황을 그린 거였는데, 사실 스토리에 끌렸다기보다는 막 대학에 온 화자가 윗 학번의 선배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과 20대 초반의 어리숙한 사랑(난 짝사랑도 이 단어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의 떨림을 묘사한 부분이 너무 좋게 다가왔을 뿐이다. 모든 이가 어떤 글들을 읽을 때 자신의 감정 혹은 경험을 투영하듯, 난 이 단편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내 새내기 시절을 화자의 상황에 대입시키게 되었다. 그 때 불던 선선한 바람의 감촉이나 초여름 밤의 나무 냄새, 그 속에 섞여 있던 그 사람의 향수 냄새 같은 거? 언제 떠올려도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것들. 캠퍼스의 나무들에는 대학교 1학년생들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마약 성분이 내재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는 김애란의 말, 나도 백이십퍼센트 동감!

 

 그 다음은 하루의 축. 인천공항에서 청소를 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쉽게 흔들리고 마음을 빼앗기는 편이다. 생활의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어찌 보면 찌질하고 궁상맞게 보이는. 그건 남들 다 하듯이 명절에 명절 음식 준비하고, 일가 친척들 모여 앉아 윷놀이나 고스톱을 즐기며 어린 조카들과 함께 영화관에 다녀온 뒤, 배불리 먹고 배부른 주머니로 집에 돌아오는 그런 삶은 아니다. 그것도 지극히 평범하기는 한데, 내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조금씩 날씨가 바뀌고 TV에서 '명절', '명절음식'따위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이번엔 만두라도 빚어볼까? 작년에는 떡국도 못 먹었는데.. 그래도 이번 연휴에는 하루 정도는 쉬게 해달라고 해볼까. 돈은 조금 적게 받겠지만 하루 정도는 내새끼랑 좁은 방에 앉아 TV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고 싶은데. 이런 정서를 기반에 둔 글들은 꼭 내 호흡이 가빠지게, 나를 울게 만든다. 참 먼 것 같으면서도 닮아 있는 그네들의 삶의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