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12 - 15/10/12
London, UK
a. 내셔널 갤러리의 꾸리한 물감 냄새와 소년 빌리.
이 도시는 무채색과 빨간색이 멋드러지게 어우러진 곳이라는 느낌. 내셔널 갤러리 안을 떠다니던 오래된 물감의 꾸리한 냄새와, 반대로 이상하리만치 좋았던 런던 사람들의 향기(애프터 쉐이브는 아닌 것 같고 향수 아님 샤워코롱같은데 대체 정체가 뭘까ㅠ_ㅠ 알아왔어야 했어),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야 했지만 아이엘츠 공부욕을 마구 샘솟게 하던 그 발음. 주말 오후, 테이트 모던에서 시간을 들여 칸딘스키의 그림을 아들에게 설명하던 젊은 아빠와 공원의 청설모에게 먹이를 주던 미화원 할머니의 웃음같은 것들이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굳이 머리 위를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나, 빌리가 안무를 마칠 때마다 터져나오던 환호, 백발 할아버지들의 기립 박수같은 것들, 뭐 그런 거.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정말 떠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내려온 온갖 바보같은 결정들을 다 만회해 줄만한 그런 선택을 내가 했구나. 뿌듯하고 벅차올랐던 밤.
b. Frieze Art Fair.
민박집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언니는 프랑스 남부에서 미술을 공부 중이라고. 말로만 듣던 젊은 CEO였는데 멀쩡히 잘 되던 사업을 접고 아베쎄데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로 날아온 대책없이 용감한 언니다. 내가 런던에 머물던 그 주 주말에 마침 아트페어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걸 보기 위해 왔단다. 런던 아트페어는 세계의 유명한 아트페어 중 하나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아침을 먹다가, 맘이 맞은 세 명이서 언니를 따라가게 되었다. 니가 여태껏 봐 온 난감함은 난감함이 아니야! 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전시들을 보면서 내가 의외로 오래 된 그림들보다 현대미술을 볼 때 더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하@_@ 아마 감상의 자유가 보장받기 때문이 아닐까 싶더라. 갖은 해석이 다 나와 있어 굳이 첨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을 보면서도 제멋대로 뜻을 읽는, 나같이 몽매한 사람에게 매력적인 분야임에 틀림없다. 한국에서 21년을 살면서도 몰랐던 내 취향이나 사소한 호불호같은 것들을 이곳에 와서는 매일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일들이 참 생소하면서도 기껍게 다가온다.
c. 포토벨로 마켓.
노팅힐은 힐링이 필요할 때 재탕하는 영화 중 하나다. 말린 빨래같은 느낌의 잔잔한 색감과 휴 그랜트 아저씨의 악센트가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라앉혀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많이 기대하고 두근거리면서 찾아갔는데 문제의 서점이 문을 닫았단다. 아니 왜 닫아? 영화팬의 설렘도 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냐?ㅠ_ㅠ 얼핏 들은 바로는 장사가 너무 안돼서 닫았다고 하더라. 헐. 뭔가 영화촬영지하면 팻말 세워놓고 성지처럼 다루는 그런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그 이유라는 게 심각하게 현실적이어서 웃겼다. 하지만 굳이 노팅힐 덕분이 아니어도 런던의 마켓 규모와 빈티지 문화는 대단했다. 여지껏 먹어 본 컵케이크 랭킹 1위를 갱신한 레드벨벳과 집에서 만들어 온 색색깔의 쿠키 케이크들은 물론, 오래 된 망원경과 나침반 같은 제품들, 옛 지도와 그림들도 많아서 눈이 호강. 오래 된 것들을 아끼고, 흘러간 시간에 가치를 부여해서 다시 소비할 줄 아는 그 의식이 참 부럽더라. 나는 2년 전에 쓰던 핸드폰, 1년 전에 입던 옷만 봐도 이런 걸 어떻게 갖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학을 떼는데 좀 부끄럽고 그랬다.
d. 조에와 히데.
런던에서 조에와 히데를 만났다! 이 날 혼자 테이트 모던을 보고 여섯시반 쯤 pimlico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하필 내가 있던 역에서 그 역으로 가는 노선이 파업;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약속시간을 30분이나 넘기고 히데에게 전화해서 울먹였더니 조에도 victoria역에 갖혀 있다며 만나서 오라고 차근차근 달래주더라.ㅠ_ㅠ 착한 히데노리! 아카리가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니다. 결국 히데는 아무도 없는 pimlico역에서 한시간이나 기다렸고 반년만에 만난 나는 사과하기 바빴고;; 셋이 짱 친절한 할아버지가 웨이터를 보는 가게에서 커리를 먹은 뒤 victoria역 근처의 펍으로 이동했는데, 얘네는 어떻게 된 애들이 저녁도 지들이 사더니 펍에서도 꼭 자기들이 계산해야겠다고 바락바락 우겨서 난감했다. 일본 문화의 꽃은 더치페이 아니였니?ㅠ_ㅠ 나는 (없는 버짓이나마) 소비하러 온 여행자고 얘들은 유학생인데, 내가 얘들한테 얻어먹는 게 너무 말도 안되는 일이라 몰래 주머니에 20파운드씩 넣어놨더니 또 용케 알아채고는 이러면 안 된다고 한사코 거절. 정색을 하고 혼내길래 쫄아서 다시 받아오긴 했는데 미안해서 잠도 잘 안 오더라. 악! 친절도 과하면 마이너스야 이놈들아. 결국 걔들한테 내가 준 건 한시간의 기다림과 나중에 한국 오면 하루 세끼 다 사줄거라는 되도 않는 호언장담밖에 없다. 아악!
check.
- 볼거리가 너무 많은 도시다. 보통 하루 정도는 옥스포드, 캠브릿지 등 근교를 여행하는 코스로 많이 계획하기에 나도 4일 런던 + 1일 옥스포드로 잡고 버스표까지 예매해놨는데 못본 게 너무 많아서 옥스포드를 취소했다.ㅠ_ㅠ 적어도 일주일은 잡아야 아쉬움이 없을 것 같다.
- 굳이 한 곳만 가라면 마켓. (규모는 포토벨로가 컸지만 브릭레인 마켓도 좀 더 와일드한 매력이 있었다//)
- 그나마 소매치기 위험이 적기 때문에 앞으로 하드코어한 가방 지키기를 해야하는 여행자들에게 첫 도시로 좋은 곳이다.
- 뮤지컬은 예매하고 가는 쪽이 기회비용이 적은 듯. 다른 공연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빌리 엘리어트는 확실히 공홈에서 하고 가는 게 낫다.
photos.
땅만 파도 하루가 훌쩍 갈 너네.
이후로도 느끼게 되지만 독일 음식이 가장 입맞에 맞았다. @_@
역 화장실은 너무 비싸다.
이 카드 안 사온 게 아직도 좀 아쉬워!!
유명한 베이글집. 살몬+크림치즈 먹었는데 세입까지 맛있었음.
노부부들이 손 꼭 잡고 걸어다니며 서로의 볼에 뽀뽀하는 모습을 유럽에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너무 아름답다. ㅠ_ㅠ
셰익스피어가 들어가는 이름의 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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